달로 - 한유주


달로?

 

0.  

암스트롱이 달에 간 시절에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작가도 나이를 속인 것이 아니라면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지만 어제 난 PC방에서 암스트롱을 봤다. 우주복을 입은 채로 누군가와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있더라. 달에는 또 언제 갈 거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내 목 언저리를 한참 바라보다 저 저글링에 당해낼 재간이 생기면 이번에는 쥐가 아니고 나도 같이 데려가 줄 거라 말하고 나에게서 5000원을 가져갔다. 그녀도 같이 데려 갈 거냐고 물어보자, 암스트롱은 인상을 구기며 나를 노려보았다. 한참을 노려보던 암스트롱은 지금 저글링을 하고 있는 게 그녀라고 말하며 내가 먹던 라면을 가져갔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0-1.  

 달의 스크랩이야. 환영이 말한다. 하지만 유령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고 주의를 준다. 자신은 환영이니까 상관없다 말하며. 과연 환영은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니 안개가 잔뜩 끼어 모든 것이 유령처럼 뿌옇다. 멀지 않은 곳에서 포성이 울려 퍼지고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위로 뭔가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위를 쳐다보니 파울 챌란이 허공에 무덤을 파고 있다. 파울 챌란에게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냐고 묻는다. 닥치면 된 다라고 말하고 그는 계속 무덤을 판다. 머리를 털어내니 말라 죽은 단어들이 후득 거리며 쏟아진다. 입을 다문다. 걸음을 띠어보니 땅바닥이 종이처럼 찢어진다. 아니 땅바닥은 종이다. 포탄에 찢어진 종이의 틈을 들여다본다. 과거와 현제와 미래가 녹아버린 단어들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 모양새가 우스워 계속 쳐다보니 그들은 이내 녹아버려 늪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곧 케르베로스도 저 곳으로 쳐 넣을 거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박제된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야. 이곳에서 그들의 가치는 똑같아. 공간을 채우는 아이콘이 되어버리는 거야. 환영이 속삭인다. 우리는 닥치는 법을 배워야해. 커트 코베인과 키르케고르가 웃으며 틈 속으로 투신해버린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지옥의 묵시록의 말론 브란도가 비치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전쟁기술을 가르쳐주고 있다. 난 진짜 시체들 속에서 영화를 찍었다고. 디카프리오는 장난감 총으로 말론 브란도를 쏘고, 말론 브란도는 화소단위로 나뉘어 공간에서 삭제되어 버린다. 전쟁은 언제나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나는 주변에 떨어져 있는 날카로운 단어를 던져 웃고 있는 디카프리오를 삭제시켜 버린다. 생의 실감 따위는 환상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고.

 

 

0-2.

 이제 보니 이곳은 끊임없이 붕괴되어 가고 있다. 환상이 실체를 만나서 붕괴되고. 시간은 서로를 겹치며 붕괴되고. 어디론가 끊임없이 도망가며 카드를 흩뿌리던 사람들은 바다에 빠져 붕괴되어버린다. 우리는 가상의 세계에 걸 맞는 인간이 되어야해. 환영이 사라지면서 중얼 거린다. 손을 내미니 환영은 모래가 되어 틈 속으로 스륵 흘러내려간다. 침묵한다. 그리고 앞으로 걷기 시작한다. 어딜 가도 길은 하나다. 앞이거나 뒤고, 오른쪽이거나 왼쪽이다. 수백 개의 이정표가 길을 닫아버린다. 이정표의 숲 속에서 폴리곤으로 만들어진 암스트롱이 쥐 열세마리와 함께 폴리곤 치즈를 뜯어 먹는다. 화소 부스러기를 닦아내며 암스트롱은 디지털 카메라로 내 얼굴을 찍는다. 내 얼굴은 두루마기 휴지가 되어 둘둘 말려 암스트롱의 목에 걸린다. 즉흥성에 매혹당한 테러리스트의 낭만과 폭발하는 쌍둥이 빌딩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강사의 야만을 부디 용서하길. 야만이라 강요된 인식을 믿고 있는 우리의 교만을 용서하길. 어디에도 이르기 싫은 채 달의 뒤편으로, 북극으로, 지옥으로 도망치는 우리의 모순을 용서하길. 암스트롱과 열세 마리의 쥐들이 한 목소리로 기도 한다. 아멘. 열세 마리의 쥐들이 암스트롱에게 달려든다. 방청객들의 박수 소리가 들린다. 거짓말이다. 이것은 고통이 표현되는 방식일 뿐이다. 손가락을 떼어내 오독오독 깨문다. 거짓말이다. 이것은 권태가 표현되는 방식일 뿐이다.

 

 

달로.  

 달로 가야해. 그래야 죽어버린 말들이 살아나고 박탈당한 인식의 시간도 부여 될 거야, 우리는 감각을 제물로 바치고 레토릭을 얻었어. 그래서 타락했지. 안개뿐인 공간에서 영화가 상영된다. 주연은 이완 맥그리거. 나는 선택하지 않는 걸 선택하겠다. 안개에 솟아난 화면이 다가온다. 우리 세대는 ......고, ......다. 패이드 아웃. 쇼트 컷으로 편집된 영화는 끊임없이 장면이 바뀐다. 달로, 달로. 맥그리거는 음악소리를 따라서 어딘가로 걷거나 주저앉는다. 도시는 밤이거나 낮이다. 거짓말이다. 오래전에 릴이 풀려버린 영사기는 ......가 되어버렸다. 끊임없이 상쇄를 일으키던 모든 것이 삭제된다.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의 꿈을 꾸고 우리는 종이 폴리곤의 꿈을 꾼다. 이 곳에선 무슨 꿈을 꿀 수 있을까. 도대체 이 공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by 삶은황도 | 2009/04/09 22:51 | 그외 | 트랙백 | 덧글(0)

핑퐁 - 박민규


읽어보신 분 만 심심하시다면 읽어주세요

 

 

‘핑’하고 시작되거나 끝나고 ‘퐁’하고 시작되거나 끝나는

 

 

- 살아 있어도 되겠습니까?  

 세계를 지배하는 2%가 실제 한다고 치면 역으로 세계에서 잊혀진 2%도 분명 존재 할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못과 모아이는 세계에서 잊혀진 2%다. 그래서 그들에겐 이름이 없다. 그들을 세계를 지배하는 2%를 대변하는 치수의 폭력의 배설 창구이고 지갑이며 설상가상으로 나머지 96%의 사람들에겐 ‘다수인 척’ 하기위해 제물로 떠밀려 버린 막무가내로 베타 되어야만 하는 존재다. 작품에서 주인공들을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적은 사실 치수나 그의 패거리가 아닌 96%의 ‘다수인 척’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주인공들의 이름을 빼앗고 무관심한 표정으로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매장시켜 버린다. 아이러니 하게도 주인공 중 한 명인 못에게 못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건 치수와 그의 패거리다. 못은 그들의 폭력자체에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말하지만 치수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감동인지 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그저 평범하게 커서 갑자기 집에 찾아온 동료 회사원들에게 5분 만에 갈비찜을 대접하고 싶은 삶을 꿈꾸던 그의 삶의 싹을 폭력으로 짓밟아 버린 치수가 한편으론 자신을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살아 있어도 좋습니다.’라고 허락해주는 인물인 것이다. ‘비록 이상한 일이긴 해도, 치수가 없으면 할 일이 없다.’(p.36) 이러한 모순 속에서 못은 모아이와 탁구를 시작한다. ‘한 세트’로 얻어맞지만 모아이는 못과는 사뭇 다른 존재다. 모아이는 별명 마냥 자신에게 일어나는 거의 모든 폭력에 석상 같은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사실상 갑부 집 아들이지만 돈으로 치수 패거리를 매수해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거칠게 비약하자면 그는 인류의 방식 자체를 불신한다. 아버지의 손에 식물인간이 된 할아버지 탓 일 런지도 모른다. 그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다름 아닌 환멸이다. 이는 ‘핼리 해성을 기다리는 모임’을 통해 아예 모든 것이 없어지기를 진심으로 열망하는 그의 태도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치수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아이러니를 지니고 있는 못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이러한 자신의 룰을 철저하게 지키고 자신이 원하는 건 적극적으로 취함으로서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는 적극적인 허무주의자라는 모순적인 모습을 고수하고 있다.

 

 

- 의견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탁구를 한다는 행위가 도대체 이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사실 인류의 역사는 지겹게 듀스 포인트를 유지하고 있는 탁구 스코어의 기록 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세끄라탱의 입을 빌어서 탁구 자체의 의미를 크게는 인류 그 자체의 문화적, 폭력적 교류에서 부터 작게는 못과 모아이의 교류를 아우르는 하나의 키워드로 환원시켜 놓는다. 탁구는 상호간의 폼(Form)이 네트를 통해 전이되는 것이라는 세끄라탱의 말 마냥 못과 모아이는 탁구를 통해 서로의 감정을 교류하게 된다. 서로의 모순이 별다른 대립 없이 섞이고 결과 적으로 그 둘은 하나의 의견을 가지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중요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이들의 일과는 여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여전히 치수에게 맞거나 치수가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그의 패거리들에게 맞고 왕따를 당한다. 결국 이들에게 탁구는 통해 세상과 융합하는 도구가 아닌 그 반대로 그들의 고립을 확고하게 정당화시키는 도구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들의 시선을 통해 지금의 세상이라는 것 사실은 소수의 누군가에게만 살 만한 가치가 부여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나머지는 그저 살 만한 척 하면서 겨우겨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반대로 세상이 깜빡해버린 이들에게 삶의 가치라는 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세상의 선택권이 걸린 마지막 탁구 시합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세뇌당한 쥐와 새를 상대로 랠리를 펼친다. 이는 기존의 약육강식의 시스템에 굴복당해 ‘잔존’하고 있는 현제의 인간상과 그들에게 낙오 당했지만 의지를 명확히 한 채 나름의 방식으로 생존하려 하는 못과 모아이의 대결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조건반사적으로 탁구를 치고 먹이를 먹는 새의 모습이 묘사되는 순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보통의 사람들과 치수의 말에 몸부터 먼저 반응해버리는 못의 모습이 모두 겹쳐져 버리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못과 모아이는 자신의 과거이기도 한 그들과 대결하고 우여곡절 끝에 경기에서 이긴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을 언 인스톨해버린다. 중학생이 아니라면 이러지 못했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

 작품의 경쾌하고 약동하는 느낌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재미를 느꼈지만 다 읽고 나니 그것이 결국 작가 자신의 환멸에서 오는 ‘헛웃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다수결의 시스템이 사실은 그저 허구가 아닐까. 결국 여전히 누군가는 끊임없이 괴롭고 우리는 즐겁지도 않은 삶을 조건반사적으로 살아가며 그것을 해결할 방도를 생각조차 안하고 있는 건 아닌가? 작가가 우리에게 날리는 서브는 가벼워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날카롭고 진지하다.

by 삶은황도 | 2009/04/09 22:48 | 그외 | 트랙백 | 덧글(0)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 (Detroit Metal City, 2008)


감독: 리 토시오

출연: 마츠야마 켄이치, 호소다 요시히코, 가토 로사


 살면서 점점 어렴풋이 느끼게 되는 사실이 있다면 내가 잘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과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개념으론 꿈과 현실의 차이라고도 일과 취미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러한 것들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고 때때로 이러한 갈등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나 전환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각종 창작물에서 이러한 딜레마를 각색시켜 소제거리로 많이 써먹고 있는 것도 대부분이 공감하는 것임에도 충분히 이야기 거리가 될 만한 무궁무진한 아이템을 이런 딜레마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2008년도 중순 즈음에 국내에 등장하여 적지 않은 인기를 끌었던 만화책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DMC) 역시 이러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딜레마를 극단적으로 과장시켜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었던 작품 중 하나다. 시부야 계열의 세련된 음악을 동경해 뮤지션의 꿈을 키우던 네기시라는 청년이, 도쿄에 상경해 의지와는 상관없이 디트로이트 메틀 시티라는 데스메틀 밴드의 보컬이 되어서 좌충우돌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OVA 형식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기존의 만화가 가지고 있는 재미있는 덕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개그만화’류의 매니악한 연출과 만화책에선 상상으로 밖에 의존할 수 없었던 등장인물들의 음악들을 그럴싸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 등이 메리트로 작용해 만화책 이상의 호평과 더불어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추어서 제작된 것이 바로 지금 소개할 DMC 의 실사 영화작품이다.


 

 보통 이렇게 수순을 밟으며 다양한 종류의 작품으로 등장하게 되는 경우 사람들은 호기심어린 관심과 함께 과연 원작을 얼마나 충실히 재현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 섞인 기대를 하게 되는데 이 작품의 경우 일단 등장 캐릭터들의 외향적인 이미지에 있어선 충실하게 재현해내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클라우져 2세를 비롯한 DMC 의 멤버들의 극악한 코스프레도 충실한 편이고, DMC를 ‘기르고’ 있는 여사장의 사악한 카리스마도 영화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말 훌륭한 수준의 재현이다. 다만 영화의 문맥상 캐릭터들을 소거시키기도 하고 (개인적으론 자본주의의 돼지가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 정말 아쉬웠다.) 조연급 캐릭터들을 다소 바꾸거나 비중을 축소시키는 등의 각색은 어느 정도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 원작의 미덕을 살려내고 있는 한도 내의 각색이어서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고 생각된다. 만화적인 가벼운 뉘앙스를 도입시키기 위해 중심 급의 출연진들이 미친 듯이 오버액션 연기를 펼친 것도 다소 거슬리긴 하지만, 이 역시 이 작품이 영화인 것을 감안한다면 원작의 가벼운 터치를 살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생각해야 할 듯. 특히 멋진 노래 실력과 이중의 모습과 이중의 인격을 갖춘 네기시의 캐릭터를 거의 완벽하게 연기한 마츠야마 켄이치의 캐릭터 이해력은 매우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생각했었던 것은 감독이 작품을 찍으면서 어디까지나 원작의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 구성을 보여줌에도 한 편으론 이 영화만으로 충분히 독립될 수 있는 요소를 만들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 였다는 점이다. 원작의 경우 주인공 네기시의 이중생활로 인한 에피소드와 자의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 등을 최대한 가볍고 웃기게 그려내고 있다고 한다면 (회를 거듭할수록 다른 캐릭터들의 이야기들도 많이 등장하지만 일단 이건 제외시키고) 영화는 그러한 원작의 에피소드들을 뭉치기도 하고 각색하기도 하면서 주인공 네기시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갈등을 비교적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영화에 진지함이 스며들어갔기 때문에 달리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네기시의 내면적인 갈등 요인을 다루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원작의 저변에 깔려 있는 소위 ‘고급문화’를 영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적허영심에 대한 풍자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점은 이번 실사영화만의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다. 감독의 의도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원작에서도 등장하는 ‘간지 사천왕’중의 한명인 프로듀서 캐릭터의 희화나 데쓰메틀을 열등감에서 가면을 쓰고 세상에 대한 욕이나 하고 있는 패배자들의 음악으로 정의시키며 역으로 현제 자신이 구가하는 문화가 정당하다고 피력하는 네기시의 상대 여성캐릭터의 발언, 그리고 네기시가 평상복 차림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부를 때 강조된 ‘재수 없음’ 등은 이러한 영화내의 풍자를 적잖이 주도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자신이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극명한 차이 속에서 네기시의 갈등은 커져가고 만화 속에서 미처 제시 못했던 이런 딜레마의 해답을 영화는 제시해준다. 어떤 음악이든지 그것은 사람들의 꿈과 희망의 대리 체다. 사람들의 꿈에 상하가 없듯이 고급스러운 음악이던 데스메틀 이건 모든 음악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꿈을 주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것의 고하를 결코 나누어서는 안 된다. 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취향의 차이가 계급의 차이를 말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이렇게 만화적인 가벼움을 일말의 진지함과 따뜻한 결말을 통해 조절해내고 있는 감독의 역량이나 연출력등은 이 작품을 원작과의 연계점 없이도 부담 없이 볼 수 있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고, 에피소드로 잘게 나누어져있는 원작을 뚜렷한 주제의식으로 묶어 영화적 통일성을 살리는 효과로도 충분히 작용하고 있다. 어찌 보면 만화를 원작으로 한 실사 영화의 교과서적인 모범 답안이 실려 있는 작품이라고도 볼 수도 있을 듯싶다.


 

 다만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러한 감독의 각색이 좋은 점만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는 것 이다. 개인적으로 DMC 만의 매력이라고 생각되는 건 1초에 강간을 몇 번 발음하나라든지 펑크밴드, 메틀밴드 그 둘 중에서 누가 더 침을 침 잘 뱉을까? 같은 논쟁처럼 락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이 어린 시절 했을 법한 유치한 음악적 담론들이 극대화 된 듯한 소소한 에피소드들에 있다고 생각한다. 불행히도 이러한 재미는 영화에선 그다지 크게 강조되고 있지 않고 있다. 이는 많은 에피소드를 섞어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려는 시도가 정작 그런 작은 에피소드들의 재미있었던 대목들을 무시하는 결과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마지막 잭 일 다크와의 대결은 각색 실패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영화의 독립된 메시지와 기존에 원작이 보여주었었던 재미가 물과 기름처럼 제대로 섞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메시지전달에 대한 감독의 고집이 조금만 약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끝으로 영화와는 별 상관없는 사족일 수도 있지만 영화 건 OVA건 음악 중 제대로 된 데쓰메틀과 블랙메틀은 단 한 곡도 없었다. DMC 의 곡은 스레쉬의 범위고 블랙 메틀의 제왕이라고 소개된 잭 일 다크의 곡은 그냥 평범한 아저씨의 메틀이었다.

by 삶은황도 | 2009/04/09 09:18 | 영상 | 트랙백 | 덧글(0)

그랜토리노 (Gran Torino, 2008)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출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비 방, 크리스토퍼 칼리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읽기 전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이제는 배우보다도 감독으로 그를 더 인정하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이스트우드는 오랜 시간동안 자신만의 세계관을 피력한 수많은 작품들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감독이다. 작품을 통해 그는 언제나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해있는 가족의 정의를 피력하며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부정해왔으며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 있어 불합리하고 가혹할지도 모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법을 피력해왔다. 그가 배우로서 마지막으로 출연했다고 선언한 작품 [그랜 토리노]는 그가 구축해온 캐릭터와 세계관의 궁극적인 발전향이 담겨져 있는 작품으로 그가 제작해온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단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출신의 월트는 독선적인 성격으로 주변은커녕 자식들에게 조차 사랑받지 못하는 고독한 늙은이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늙은 개 데이지와 자신이 젊은 시절 손수 조립한 자동차 그랜토리노. 어느 날 이웃집 소년 타오가 갱단의 협박으로 그의 그랜토리노를 훔치려 하지만 월트의 제지로 미수에 그치게 된다. 며칠 뒤, 타오를 핍박하려 찾아온 갱단이 월트의 마당에 침범하게 되자 월트는 갱단들을 내쫓게 되고 그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타오와 타오의 가족 모두를 봉변에서 지켜주게 된다. 자신들을 구해준 것이라 착각을 한 타오의 가족은 월트에게 선물과 꽃을 주며 고마워하지만 애초에 인종 차별주의자인 월트는 그것을 마득찬게 여긴다. 그러던 중 타오는 자신의 죄 값을 갚고 싶다며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월트에게 찾아오게 된다.


 

 이렇게 영화는 월트와 이웃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월트가 점차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람들과 교류를 하게 되는 과정을 큰 과장 없이 담담하게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 재미있는 것은 월트의 독선적인 성격에 대한 감독의 시점이다. 그는 인종 차별주의자에다가 무신론자인 동시에 집에 항상 성조기를 걸어놓는 보수적인 애국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런 묘사들은 대부분의 영화들이 보여주고 있는 참전용사에 대한 시각이기도 하다. 슬픈 희생양임엔 분명하지만 결국 젊은이들과 소통이 이루지 못하는 보수적인 꼰대로 말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런 시점에서 한 발 더 앞서나가. 월트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선량함의 정서를 포착해내려 한다. 이웃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월트는 그들의 문화를 알게 되고 일정부분은 받아들이려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억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못 이기는 척 이웃집의 파티에 끌려가게 되지만 영화 속에서 그가 처음으로 밝은 표정을 보여주는 것 역시 이 이웃집의 파티에서다. 이런 그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그가 지니고 있는 차별적인 감정뿐만 아니라 주변인을 거부하는 그의 모든 독선적인 성향 역시 자신의 진짜 자신의 내면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근본적으로 월트라는 인간은 과거의 죄악감을 홀로 감당하려 애쓰는 올곧고 고독한 늙은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이 극중에 등장하는 몇 가지의 상징물이다. 지하실 상자 속에 ‘버려져’있는 월트의 훈장과 차고 속에 들어가 나오질 못하는 멋진 빈티지 자동차 그랜토리노는 영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상징물이다. 이것은 월트 자신의 자아를 은유적으로 표현해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훈장은 월트가 숨기고 홀로 짊어져야 마땅한 과거의 죄악과 지켜나가야 할 책임으로, 차고에서 나오지 못하는 그랜토리노는 과거의 무게와 죄악감에 봉인되어 버린 그의 ‘정상적인’ 미래로 말이다. 월트가 마음에 문을 점점 열게 되는 후반부에 가서 타오에게 그랜토리노의 세차를 부탁하거나 아무도 태워주지 않는 그랜토리노를 빌려주는 행위는 그래서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마치 손주에게 자신의 옳은 것을 물려주고 미래를 맡기는 듯 한 이러한 행위는 기본적으론 타오가 아닌 가족에게 해야지 당연한 행위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가족이 아닌 테오에게 자신의 것을 물려주려 한다. 심지어 후반부에 가서는 자신의 훈장과 함께 자신의 그랜토리노 마저 타오에게 물려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여태까지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서 강조되어 왔던 가족의 사랑과 관용의 정서의 확장적인 면을 드러내는 대목으로 있는 피로 섞이지 않았더라도 심지어는 인종이 다르더라도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이 바로 가족이다라는 이스트우드의 발전된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단순히 그랜토리노 뿐만 아니라 훈장을 물려주는 그의 행위는 보다 나은 미래를 물려주려는 그의 배려뿐만 아니라 자신이 짊어지고 있었던 책임까지도 함께 물려주는 행위로 해석될 수도 있기에 무척 의미심장하다.


 

 현란한 영상도 감각적인 연출방식도 영화 속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단순히 월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몰입도는 대단히 뛰어나다. 이는 내용이 전개될수록 빛을 발하는 영화의 뛰어난 이야기 전개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이스트우드의 작품들이 가장 빛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가장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면 이런 전개가 가능할까? 전반적으로 여유가 느껴지는 관조적인 면모를 지향하고 있음에도 관객들은 영화의 서사가 무척이나 단단하고 군더더기 하나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타이트하다라고 느끼게 된다. 갈등과 해소의 절묘한 완급조절능력이 없다면 쉽게 이루어낼 수 없는 경지라고 생각한다. 특히 얼마 등장하지는 않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폭력의 묘사들은 무척이나 탁월하다란 생각이 들었는데, 너무도 리얼해 오히려 끔찍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이러한 장면들은 온화한 영화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긴장시키게 만드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이전에 제작했었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도 이러한 방법론은 사용되었지만 개인적으론 이번 작의 연출방식이 더 효과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여전히 총을 들고 나오지만 이 영화에서 정말로 그가 총을 쏘는 대목은 단 한 장면도 없다. 그 대신 그는 버릇처럼 손으로 총을 만들어 입총을 쏜다. 이렇게 입 총을 쏘는 장면은 마지막 장면 이외에도 영화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몇 번 등장하는데 스스로에 대한 멋진 패러디인 동시에 더 이상 남을 죽일 수 없게 되어버린 그의 애처로움이 느껴지는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론 이 장면을 보며 그동안의 모든 이스트우드 캐릭터의 순차적인 발전양상의 끝을 보여주는 행위로 여겨져 뭉클하기 까지 했었다.


 

 무엇보다도 압권인 대목은 영화의 마지막 15분이다. 그동안 이스트우드 영화의 주욱 봐온 팬들이라면 영화의 결말부에 놀라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갱단에게 범해진 타오의 누나를 위한 복수를 계획한 그가 선택한 것은 피 튀기는 총격전도 아니었고 늙은 생강의 매운 맛을 발휘한 멋진 작전도 아니었다. (그의 초창기 대표작인 용서받지 못한 자의 결말부와 비교해 보라.)대신 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들에게 총을 맞음으로써 갱단이 경찰에 잡히게 한다는 방법을 쓴다. 개인 적으론 이 대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연상되었는데, 그가 죽기 전에 하는 번민이나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듯 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그리스도의 마지막과 무척이나 흡사한 구석이 있다.


 이런 연출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월트의 죽음과 신의 죽음을 비교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당연히 월트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다. 심지어 죽음을 결심하기 이전까지 무신론자의 입장을 고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궁극적으론 마치 신과도 같이 선의의 희생을 하기에 이르른다. 단순히 어떤 숭고한 멋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런 결말을 택했다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감독은 굳이 월트가 죽음을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줌으로써 그의 인간성을 강조한다. 감독은 월트를 영웅으로 만들지도 않고 신과 같은 위대한 존재로 보이게 만들지도 않는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지독하게 선량하고 올곧은 평범한 노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대단한 것이다. 감독은 굳이 평범한 노인일 뿐인 그가 당연하다는 듯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월트 하나를 영웅의 영역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월트로 대변되는 평범한 사람들 모두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숭고함 그 자체를 영화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대단한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 그자체가 세계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면서 말이다. 결국 월트의 희생 역시 자신의 죽음을 ‘모든 사람’이 증언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 했었으니 말이다.


 감독 최고의 명작이라는 표현은 그가 제작해온 수많은 명작들에게 실례가 될 수 있으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현제 그 자체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작품 정도로 표현해야겠다. 덧붙여 영화가 끝난 후 엔딩 크레딧이 다 끝날 때까지 멍하니 앉아있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작품역시 이번이 처음이었다.

 

PS. 체인질링에 이어서 이번에도 이스트 우드의 친아들이 단역급으로 출연했다. 그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찾아보는 것도 영화
      의 잔재미. 개인적으론 정말 이스트우드 답다라고 생각했었다.

by 삶은황도 | 2009/04/07 18:12 | 영상 | 트랙백 | 덧글(0)

더 레슬러 (The Wrestler, 2008)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출연: 미키 루크, 마리아 토메이, 에반 레이첼 우드

 

-스포일러성의 글이 실려 있으니 참고바랍니다.


 

 프로 레슬러들의 삶은 고달프다. 개인적으론 느끼기에 그들의 가장 큰 곤욕은 아마 지옥과도 같은 스케쥴에서 오는 악순환 아닐까 싶다. 정상적인 격투가들과는 달리 그들은 스토리를 이어나가기 위해 매주 출연 해야하며 그 탓에 경기 중의 데미지는 그대로 축적되어 고질적인 관절 통증을 달고 살아야 한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파열되지 않는 이상 이들의 이런 행보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와중에도 괴물과도 같은 그들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엄청난 양의 운동과 근육을 팽창시키는 약물 투여를 병행해야한다. 이런 이들에게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건 약물 투여의 부작용으로 생기는 만성적인 우울증과 언제든 만신창이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몸. 모두의 사랑을 받는 인기 최고의 레슬러가 어느 날 갑자기 자살을 하거나 심장마비로 죽기도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이런 고달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 레슬러라는 직업은 그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매력적인 직업이다. 일단 한 번이라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 그들의 대부분은 ‘자의’로 레슬러라는 직업을 포기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단순히 돈과 레슬링에 대한 끝없는 열정 때문일까?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08년도 작품 ‘더 레슬러’는 다 망가져 가는 몸을 이끌어서라도 링에 나설 수 밖에 없는 레슬러들의 삶의 이면을 감독 특유의 관점으로 묘사해내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 속 주인공 램은 80년도에 최전성기를 구가했었던 프로 레슬러다. 남들처럼 뚜렷한 은퇴계획이 없었던 그는 별다른 삶의 전환도 만들어보지 못한 체 전성기를 넘겨버리고 점점 퇴락해 현제에 이르러선 마이너 프로레슬링 대회에 근근히 출연함으로써 근근히 벌어먹고 살고 있는 신세다. 그것만으로는 월세도 감당하기 힘들어 파트타임 아르바이트까지 해야하는 신세. 그러던 어느 날 경기를 위해 투여한 약물을 심장이 견디지 못해 쓰러진 그는 두 번 다시 격한 운동을 하게 되면 안 된다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된다. 레슬러로서는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진단을 받은 그는 진지하게 은퇴를 결심하게 되고 오랫동안 잊어왔었던 딸을 떠올리게 된다.

 

 대강의 스토리라인을 본다면 뻔한 결말이 예상되는 휴먼 드라마로도 충분히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늙은 남성의 집념어린 화려한 재기도, 감동적인 자아 찾기도 아니다. 감독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건 그의 전작인 파이나 레퀴엠에서 그래왔듯 끝없이 무언가를 갈망하게 되어 파멸일지도 모르는 길에 이르게되는 인간 그 자체의 다큐멘트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감독은 어떠한 미화도 비웃음도 없이 프로 레슬러 램의 삶 그 자체를 멋지게 작품으로 승화시켜내고 있다.



 주인공 램은 스포트라이트 밖에선 철저하게 고립된 인간이다. 그는 여전히 80년대를 향수하고 있으며 그의 인생은 거기에 멈춰있다. 그는 AC/DC 와 GNR 로 대변되던 80년도 락 음악을 언제나 즐겨들으며 여전히 동네아이를 꼬드기는 방식으로 8비트 닌텐도 게임기를 애용한다. 이는 요즘 인기게임인 Calls Of Duty 시리즈의 신작을 아냐고 묻는 동네아이와 작년에 데뷔한 인디락 밴드 Vampire Weekend 의 포스터가 걸려져 있는 딸의 집과 묘하게 매치가 되며 주인공이 느끼는 고립감을 대변하는 장치로 사용 되기도 한다. 작품에선 이런 그와 소통을 이루는 유일한 대상으로 램이 자주가는 술집의 여성을 등장시키지만 그녀 역시 이젠 시들어가는 미모를 애써 감추며 살아가는 잘 팔리지 않는 스트리퍼일 뿐이다. 램에게 그녀는 소중한 이해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젠 사라진 것들에 대한 집착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은퇴 후 램은 이런 고립감과 외로움을 가족의 애정을 통해 극복하려 하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 은퇴 이후 고립된 램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는 이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현실세계가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그러한 안락감은 진실한 평온이 아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대역과도 같은 존재로 치환 되어버린다. 결국 그는 진실로 외롭고 쓸쓸하지만 스포트라이트 이외의 것에는 충족감을 못 느끼게 되는 존재로 스스로를 자각하기에 이르른다. 충분히 노력하면 그들과 잘 지낼 수도 있었음에도 램은 그러지 못한다. 결국 그는 딸과의 약속도 어기고 레슬링을 포기하고 자신과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자는 여인의 말도 무시한다. 현실 세계에서 램은 영화 속 딸의 절규처럼 ‘이기적인 패배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가 되어간다. 사랑하는 사람도 가족도 잃고 이젠 귀도 잘 안 들리는 만신창이 몸이 되어 외로움에 치를 떨면 떨수록 그는 레슬링이라는 허구의 세계에서 쏟아졌던 스포트라이트와 그곳에서 느꼇던 승리자의 고양감을 그리워한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현실이란 허구의 레슬링 세계 뿐 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램의 모습을 담아내는 카메라는 더할 나위 없이 가차 없으면서 디테일하다. 적지 않은 컷이 존재함에도 마치 롱 테이크로 영화를 찍은 것처럼 영화의 모든 씬 들은 너무도 순차적으로 이어져있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모든 장면이 자연스럽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이러한 차분한 전개를 주로 이용하면서도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레슬링 장면에 있어서 만큼은 최대한 과격하고 적나라한 연출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웃으면서 경기 순서를 얘기하다가 급작스레 유혈이 낭자한 하드코어 매치로 전환되는 연출은 무척이나 탁월하고 섬찟했다. 배우진의 연기도 무척이나 훌륭했는데 특히 주연인 미키 루크의 연기는 카피 문구 마냥 신들렸다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훌륭했다. 간간히 조연급으로 활동하고 있었긴 하지만 미키 루크라는 배우를 주연 캐릭터로 내세운 과감한(?) 케스팅 자체도 매우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미키 루크가 가지고 있는 퇴락한 중년 남성의 이미지와 영화 속의 램의 캐릭터가 완벽하게 맞물림으로써 생기는 시너지 효과가 결과적으로 영화가 기존적으로 지니고 있는 리얼리즘의 미덕을 두 배 아상으로 증폭시키는 원동력을 마련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독은 다름 아닌 외로움이라는 것을 쇼비지니스의 허상에 중독된 램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감독은 너무도 훌륭하게 표현해내고 있고 결과적으로 감독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담뿍 담겨진 정말이지 훌륭한 작품이다. 영화의 여운과 더불어 경기가 끝난 뒤 상처투성이가 된 램의 뒷 모습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by 삶은황도 | 2009/04/07 13:41 | 영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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